쓰기마당 > 글나라우수작품 > 우수작품

우수작품

제목 여름날
작성자 김수민 작성일 2017-12-02
작성일 2017-12-02

_- 여름날 -_



언제나처럼 바람이 불어오면 당신이 눈에 들었다.


무덥던 그 여름날의 추억을 회상하게끔, 그렇게 당신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나의 기억 속에서 일렁거렸다.

당신이 제 손에 꼭 쥐어줬던,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느릿하게 먹은 탓에, 그것은 녹아버려 진득하게도 내 손에 흘러내렸지만, 나는 아직도 당신이 줬던 그 아이스크림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



그렇게 나와 당신의 여름은, 강렬했다.



*



창밖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그에 맞는 넓은 그늘을 내렸던가.


그래서인지,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그 시골집만은 시원했다.

그 집 마루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꽤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 무엇 하나도 전혀 급하지 않은, 급할 필요가 없는 여유로운 여름날이었다. 그래, 당신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훤칠한 키는, 위압감보다 오히려 든든함을 느끼게 했다.

퍽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낯은 참으로 순박하고 다정하게 보여 오히려 더 어울렸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사내의 눈이 가장 좋았었다.

사내의 눈은 아래로 조금 쳐져있었으며, 항상 따뜻한 다정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 눈은 쌍꺼풀이 없었고, 속눈썹이 참으로 길어, 옆에서 보면 꼭 나비가 날개짓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올곧은 눈동자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내에게 내 속마음이 모두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만 같아서 가끔은 오싹함을 느끼는가, 싶었다.


허나, 그 무엇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을지 모른다.



나는, 사내를 좋아했다.



**



그와 단둘이서 , 숲 속에 있다던 냇가로 향했다.


사내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 손목을 놓칠세라

꼭 쥐어 잡곤 날 냇가로 이끌었다. 사내의 손은 내 손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더 컸다. 사내의 손은 거칠지만 부드러웠고, 또한 순박함이 가득 묻어 나와 있었다.

이렇게 사내에게 계속 제 손목이 잡혀있었으면, 했다.


냇물에 손을 가만히 담그고 있던 그는, 이내 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시원하다며 맑은 웃음을 짓던 사내의 표정이 내게는 냇물보다도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함께 있던 이 냇가보다도,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보다도 사내의 투박하고도 정감가는 손이 좋았다.



그 손에 언젠가, 내 손을 포옥 겹치고 싶었다.



***



왠지 하늘이 우중충했다. 꼭,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이 예사롭지 않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늘은 먹구름을 잔뜩 끌고 와, 그들을 벗 삼아서는

무자비한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언제나처럼 나를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맑고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그 투박하고 큰 손으로 내 머릴 가만히 쓰다듬었을 사내가.


그날따라 온몸이고 낯이고 할 것 없이, 목석처럼 딱딱히 굳어서는 그저 아무 말도 없었었다. 아, 혹여나 사내가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었으며, 가만히 제 옆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사내의 낯빛은 어두웠다. 늘 빛나기만 하던 그 순박한 낯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무엇이, 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건가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신, 나는 말 없이 사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사내가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손을 맞잡아 주는 것이 다였으니. 나는 그냥, 살풋 웃어만 주었다.


사내의 손에는, 다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한결 풀린 낯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름대로 부끄러워, 저는 낯을 붉혔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그런 나를 보고는 크게 웃더니, 이윽고 운을 떼었다.



".. 나는 비 오는 날이 무서워요. "


또, 소중한 사람이 없어질까 봐. 그래서 두려워요.


말을 이어가는 사내의 목소리는, 무거운 두려움과 슬픔이 한데 섞여 흐르다 못해 넘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 사내의 끝없이 깊은 슬픔이, 내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사연은 이랬다.

사내에게 하나뿐인 동생이 있었다만, 그 동생은 유난히도 몸이 병약했단다. 허나 그 마음은 강직하고, 또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정했었다고 했다. 도시에서 살다, 몸이 약한 동생을 위해 이곳으로 내려와 살았던 그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섰었다. 그렇게 유약하고 다정하던 동생은, 사내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이 억수 같은 비가 내리던 여름날.

동생이 아침 일찍 산속으로 갔다가, 오후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었던 것이었다.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아, 그도 안심했었지만, 오후부터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점점 불안해졌었던 사내는, 빗속을 헤매며 동생을 찾으러 다녔지만, 그에 돌아온 건 동생의 신발 한 짝이었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이 비를 견뎌내었었나.


이렇게 순박하고, 또 여린 사람이 어찌 홀로 그날의 일을 견딜 생각을 했었나.


아직 사내는 그 일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너무나 아파했다. 어떤 마음에서였나. 나는 순간, 그를 이 양팔로 꽉 끌어안곤 토닥이며, 귓가에 속삭였었다.


아마도, 이젠 내가 있다고, 나와 함께 견디자는 내용이 아니었었나 하고 어렴풋이 기억해본다.


그는 내 말에, 이제 그 자신이 날 끌어안으며 한참을 울었었다.

그동안의 응어리져 있던 것을. 자신의 마음에 겹겹이 쌓여 곪아 터지려던 그것들을 울음으로써 모두 토해낸 사내는,

이제 한결 편해 보였다. 그는, 더 이상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더욱 밝고 따스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사내가 다시 웃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이제 슬슬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 터였다.


사내는, 뛰어왔는지 헉헉거리며 날숨을 쉬면서, 반쯤은 녹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제게 건넸다. 그리고 사내는, 이전의 숲 속

냇가로 나를 이끌었다.



" 다시 돌아간다면서요. "


사내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차분했다.

냇물에 손을 담갔다, 뺐다가를 반복하며, 손장난을 치던 사내는 아무 말이 없는가 싶었다. 그러다 냇물로 차가워진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곳으로, 다시 와줄 건가요? 나는 아직, 비를 혼자 견뎌낼 자신이 없어요. 난, 난... "


이번엔 내가 먼저, 그의 얼굴을 감쌌다. 아이스크림은 이미 내려놓은지라, 두 손을 써서 제대로 그의 얼굴을, 맞잡을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살며시 웃어주었다.



" 다시 올게요. 꼭, 약속해요. 당신이 날 기억하고만 있어 준다면. "


사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글썽였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내 뺨을 어루만지더니, 거기에 자신의 입술을 잠시 가져다가 대었다. 그리곤 수줍게 웃으며, 뒷머릴 긁적였다.



"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다시 이곳에 올 때. 그때 말해줄래요. "


그러니 꼭, 다시 이곳으로 와요. 또 당신과 함께할테니.


그게 사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마, 나와 사내가 서로에게 해주고 싶던 말은 같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처럼,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삼켜두었으니까.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할 날이 오기를.

선연한 그 여름날에 다시 찾아갈 수 있기를.

그 속에서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나는, 아직도 기다린다.

다음글
구멍난 나무
이전글
76년생 이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