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마당 > 글나라우수작품 > 우수작품

우수작품

제목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작성자 유다은 작성일 2017-10-18
작성일 2017-10-18

  오랜 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하얀 봉투 하나를 준다. 청첩장이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서 주변 이들에게 청첩장을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평소에 결혼이란 여성에게만 일반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제도라 주장하던 친구였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는 대신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친구에게 받는 청첩장이라니올해 내가 맞은 일중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하얀 봉투를 뜯으니 여느 청첩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구가 나왔다. 함께 슬기롭게 잘살아 가겠다는 글귀였다. 정말 흔한 문구였는데 괜스레 함께라는 단어에 눈이 갔다. 과연 이 친구는 이 결혼이라는 관문을 평생의 동반자라 정한 이와 함께 걸어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아직은, 역시 여자는. 그래도 엄마니까 라는 이름 뒤에 남편의 그림자를 따라 가는 선택을 하는 이 땅의 여성들의 뒤를 따라갈 것인가. 친구는 졌다고 표현했다. 동거를 하는 여자에게 붙는 많은 수식어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만날 때마다 눈물을 보이며 제발 결혼을 하라고 사정하는 엄마의 하소연으로부터, 그리고 여성의 몸으로 온전히 내 삶을 책임져야 하는 불안감까지, 이 많은 이유들에게 졌다고 했다. 친구의 손을 잡아 주며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너라면 희생 없이 결혼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것이라는 위로를 해 주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허한 마음에 서점을 들렀다. 그리고 집어든 책이 82년생 김지영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꼬박 책을 읽었다. 그리고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이제는 그만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이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여성의 보편적 이야기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지영의 인생 속에 내 인생이 있고 내 인생 속에 김지영이 있는 그런 희한한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임신을 하고 지하철을 탔던 김지영이 그러했듯, 나 또한 그런 비슷한 일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아직 임신 초기처럼 보이는 여자 하나가 가방에 임신부라 표시하는 분홍색 명찰을 달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임산부 배려석 앞이었다. 그 자리에는 50대처럼 보이는 아저씨 한명이 앉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흘긋흘긋 그 아저씨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저씨를 깨워볼까 라는 생각이 잠시 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러나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만약에 내가 저 아저씨를 깨웠는데, 자기의 실수를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적반하장으로 내게 욕을 하면 어쩌지. 저 나이 때의 아저씨들이 술에 취해 옆 사람에게 괜히 시비를 것을 보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괜히 시비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모른 척 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왠지 서글퍼졌다. 한 생명을 품고, 또 그 아이를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무사히 키워내기 위해 직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녀가 저런 작은 배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모습 이 꼭 앞으로 내가 가야 하는 길 같기도 했고, 또 내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일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저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면, 그 아이가 겪어내야 하는 세상도 마찬가지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그녀는 그 아저씨를 일으키고 앉는 대신, 옆 자리 할머니가 양보하는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씁쓸한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세무사 사무실을 다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 내가 일하는 곳에 대해 물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콜센터이다. 10년간 멀쩡히 잘 다니는 직장을 두고 콜센터로 이직을 한다고 내 일에 대해 물으니 뜬금이 없었다. 친구의 사정을 이랬다. 지금 자기가 다는 세무사 사무실을 임신을 하는 순간 바로 퇴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일의 특성상 야근도 많다보니 본인이 버틴다고 해도 아이에게 무리가 갈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육아휴직이나 여러 가지 여성을 위한 제도가 잘되어 있는 콜센터로 자리를 옮길까 생각중이라고. 그 때 친구의 말을 들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콜센터가 아이 키우면서 다니기는 좋지. 콜센터는 아무래도 일하는 사람들의 성별이 대부분 여성이다 보니 육아나 출산에 대한 복지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한 때 품었던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를 키우기 적합하다는 이유로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상담원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꼭 콜센터가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의 이런 제도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건데, 대부분 그들은 그런 사회제도를 비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봉의 돈을 받으며 일하면서도 콜센터의 복지 환경을 다행이라 여기며 고마워한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분명한데 말이다.

 

  다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신혼여행을 갔단 온 후부터 전쟁이라 했다. 똑같이 일하면서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표현하는 남편과, 그리고 명절이면 며느리라는 이유로 모든 일을 도맡아야 하는 상황과, 그리고 아무렇게나 툭툭(자기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아이를 가져야 되지 않느냐고 묻는 주변인들로부터 자기는 싸우고 있다고 했다.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 친구가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80년대에 태어났던 나를 포함한 이 땅의 김지영들에게 잘해왔다고. 그리고 잘 싸워가자고 격려의 말을 건네고 싶다. 그대들의 미래에 찬란한 빛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