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마당 > 글나라우수작품 > 우수작품

우수작품

제목 ‘삼일혁명, 독립만세운동을 영도한 의암 손 병희’를 읽고
작성자 윤태빈 작성일 2018-01-25
작성일 2018-01-25

 저는 가족들과 함께 경복궁을 구경하고 종로일대를 산책하며 돌아보던 중 탑골공원 중앙에 동상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동상에 대해 알아보니 의암 손병희 선생님이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누구인지 무엇을 하였던 인물인지에 대해 무지하여 이에 저는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구립도서관에 가서 의암 손평희 선생의 전기에 대해 읽기 시작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던 3·1혁명의 민족대표33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근현대사에 대해 어두운 저에게 있어 새로운 인물이셨습니다. 이에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이 궁금증 하나로 손병희 선생님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게 되었습니다.

 저가 알기에는 대부분 위인에게는 이름 앞에 호가 붙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호는 부모, 스승, 친우 등 남이 지어주어 그 인물의 취미나 성격, 능력 등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간단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손병희 선생님의 호를 알아본 결과 소소 거사 이셨습니다. (웃음 소)는 웃다, 기뻐하다 등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笑 笑가 거듭 두 번 들어가 있으므로, 한가롭게 기뻐하며 웃는 그런 뜻입니다. 居士(살 거, 선비 사)는 말 그대로 숨어 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가리킵니다. 또한, 놀려대는 말투로 일하지 않으며 놀고먹는 사람이란 뜻도 있고, 불교에서는 출가하지 않은 수도자의 법명으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소소 거사(笑笑居士)의 함축적 의미를 의암 손병희 선생의 전기를 읽으면서 접목해보면 큰 뜻을 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의 유유자적과 같은 삶의 태도가 반영된 별호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웃고 사는 대자유인이라는 큰 도를 깨달아 생각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무위자연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소소 거사라는 호가 말해주듯 인생을 낙천적으로 사시며 바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평범한 생활과 인간 세의 속세를 벗어나 자유분방한 대인과 같은 삶을 사신 거 같아 소소 거사라는 호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선생님을 현재까지 알리고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업적은 바로 올해 98주년이 되는 3.1혁명,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3.1혁명은 기본적으로 한국민족이 일제의 조선병합, 즉 식민지화에 대한 원천적인 거부와 일제의 식민지 조선지배정책에 대해 전면적인 저항의 의사를 표시한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3.1혁명은 20세기 한국역사에서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한국인이 하나의 목표를 갖고 대동단결하여 직접 행동에 참여한 일은 3.1혁명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3.1혁명을 통해 한국인들은 신분, 계급, 지역을 넘어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즉 한국인은 이 운동을 통하여 명실상부하게 근대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3.1혁명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도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혁명은 한민족의 독립 쟁취에 강한 자신감을 부여하였고, 이후 해방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이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운동으로써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의 독립은 자명한 사실이 될 수 있었으며, 이 혁명은 대외적으로는 항일운동이며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 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또한 무장독립운동을 유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국경 일대에서 독립군이 조직되어 1919년 가을부터 활발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3.1혁명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 운동은 또 이후 대중운동을 고양하고 노동자와 농민층이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족운동을 크게 확대된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종식하고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하였으며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의 활동공간을 넓어지게 한 의의도 있습니다. 또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아시아 각국 민중의 반제민족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역사적 의의가 큰 3.1혁명,독립만세운동이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1919년이라는 시점에 전민족적인 봉기를 감행하였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저가 알아본바 191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우선 한국과 가까운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 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출범하였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1918년에는 독일 제정이 무너지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1914년 반발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말 종식되면서 세계정세의 대격변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공표했는데 각 민족은 그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며 외부로부터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약소민족의 자주독립 사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에 국력이 약한 한국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힘을 축적했다가 국제정세의 변동을 능동적으로 포착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주고 독립을 챙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세계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 국내에서는 제일 처음 1918년 말부터 수차 회합을 하고 1차 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을 논의한 것과 19191월 중순경 만세시위운동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는 것을 전기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운동의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도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3.1혁명의 기틀을 닦아 놓은 것 임으로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거사 일을 31일로 결정한 것도 의암 손병희 선생님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정한 이유로는 첫째, 당시 고종황제의 국장을 2~3일 앞두고 각 지방에서 다수 인사가 서울에 모였을 뿐 아니라 고종황제를 일인들이 역신배를 부추겨 독살하였다는 말이 떠돌았기 때문에 인심은 극도로 격분하여서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3.1은 삼위일체의 철학적 용어로서 영토, 인민, 주권의 3 요건으로서 일국 가가 성립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사 일에도 이유를 들어 신중하게 결정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 종교계와의 연합을 성사시켰으며 운동에 필수적인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것에도 앞장섰으며 이처럼 3.1 독립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님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민족운동의 모의,준비와 자금지원 둥지를 규합하는 중추적인 임무를 스스로 담당하여 민족항쟁을 이끌어나간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통합 통솔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권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 첫 서명자를 의암 선생님으로 추대할 정도 출중한 인격과 인품을 가지셨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태화관에서 일경에 끌려간 의암 손병희 선생님과 민족대표들이 재판을 받으며 힘겨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서울과 국외에서 각각 수립을 선포한 두 곳의 임시정부는 의암 손병희 선생님을 수반으로 하는 각료명단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3.1혁명 과정에서 민중은 종파, 지역을 초월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님을 민족의 최고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장시간의 독방 수감과 열악한 급식, 수감자끼리도 대화와 만남을 할 수 없는 외로움, 가족면회는 물론 사식도 금지된 상태에서 위장병 때문에 건강은 악화하였고 뇌내출혈 또한 재발하면서 62세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게 되었습니다. 유언에서도 민족투쟁을 계속해나가 달라고 부탁하였고 마지막조차 나라를 위한 걱정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감동적이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1945815일 해방의 날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사후 23년 만에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습니다. 27년 망명기간의 독립운동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님은 순국지사 순방 첫 번째로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임시정부의 환국을 보고하였습니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님조차 삼일 혁명을 주도하신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해 존경과 업적에 대해 인정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분명히 살았던 삶 보다 덜 괴롭고 훨씬 더 편안하고 조용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병희 선생님은 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일부러 살아가셨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고, 나라의 독립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절망하고 일본인들에게 힘없이 무릎을 꿇고 복종 당하기 쉬웠지만 의암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한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이 없어지면서 우리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이 얼마나 비굴하고 억울한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이 모든 업적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포함한 21세기의 우리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될까?’, 어떻게 하면 나중에 잘 살까?’ 같은 생각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자신만을 위해 사는 듯합니다. 100 년 전 의암 손병희 선생님께서 가졌던 애국심과 나라에 대한 사랑은 지금은 많이 잊힌 듯합니다. 부끄럽지만 저 자신 또한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선생님의 소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나라는 손병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문화가 발전되고, 아름답고,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다시 약해질 수 있는 위험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 속에서도 의암 손병희 선생님과 같은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정신으로 우리는 위험을 이겨낼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자유는 힘들게 얻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희생을 대신해 얻은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 자유를 언제, 누가,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인지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 독후감을 계기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고 의암 손병희 선생님께서 현재까지 존경받는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유익하였습니다.

다음글
열닷새를 거쳐서
이전글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