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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아스트로넛 리콜
글쓴이 박유신




astronaut recall : 우주비행사의 회상

대학교 1학년, 박유신




20230714, 54%

나아갈 수 없다면 돌아가야만 한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으니 아침과 밤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아니, 사실 아침이고 새벽이고 똑같은 시간을 굳이 잘라낼 이유도 없다. 그런 것에 매달렸던 지난 삶 같은 건 우습게 부서진다.

암흑에서 시작돼 암흑으로 끝나는 하루

암흑 속에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어딘가 비틀려있고 깨져있고 찢어져있다. 발이 땅바닥에 붙지 않는 공간에서도 똑바로 먹고, 입고, 관찰하는 것. 그걸 해내기 위한 지난 오 년의 훈련이 무색했다.

글쎄, 조난당하기 전까지는 얼추 잘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선체에서 다섯 번째로 멀리 떨어진 별을 관찰하던 찰나 불현듯 허기가 밀려왔다. 왼 팔을 들어 시침과 초침을 포착하려 애썼다. 음식물을 섭취한지 열세시간하고도 이십구 분 째였다. 선체 벽에 설치된 바를 잡고 큰 보폭으로 다가가 냉동고 문을 열었다. 맨 위 칸에 쌓인 곡물바 중 하나를 잡아 비닐 끝을 이빨로 반복해서 씹었다. 꽉 깨문 이가 부끄러울 만큼 비닐이 쉽게 찢어졌다.

고장 난 우주선 안에서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자신과의 대화뿐이다.

묻고, 묻고, 또 물으면 하루가 간다.

사실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 온 것들이 종일 나를 괴롭힌다. 가령, 이루지 못한 사랑 같은 것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엉켜버리면 창 바깥을 본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깜깜함이 왈칵 덮쳐온다. 특별히 운이 좋으면 소멸하는 별을 만날 수도 있다. 이건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다. 나는 빛을 잃은 별을 지켜보고 그 별도 내가 종말해가는 걸 지켜본다. 우리는 서로의 마지막을 기억할 유일한 존재다. 늙은 별은 순식간에 조각난다. 뭉쳐있었던 적 없다는 듯 흩어진 파편들이 제 갈 길 가는 걸 보면서 죽음이란 고작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다. 솔직히 언제나 삶은 별 거 없었다. 너무도 쉽게 흩어지고, 사라지고, 뭉개졌다. 그렇지 않았던 것도 인생을 통틀어 단 하나 있긴 했지만.

어쨌든 사라져가는 별 조각들을 눈 안에 쓸어 담는다.

이곳에서는 어떤 것도 깊은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감상에 젖는 일도 현실이 허락하는 한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뜯어놓은 곡물바를 한 입 물어본다. 밍밍한 귀리 맛이 입안에서 감돈다. 다시 길 위로 돌아가 과거의 기억을 줍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네 생각을 해야만 한다. 너를 떠올리기만 하면 절박하도록 살고 싶어진다. 손목과 발목의 힘줄이 끊어져도 좋으니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각오했던 일인데도 끝없이 억울해진다. 그래서 그 순간 겨우 찾아낸 한 장면은,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이 년을 다 못 채웠을 무렵, 달의 뒷면은 어떻게 생겼어요? 라는 아이의 질문에 귀기울여주던 초임 선생님. 자신도 항상 달의 뒷면이 궁금했노라고, 우주비행사가 되어서 연재가 선생님한테 보고 말해달라고.

선생님, 그럼 우주비행사가 될래요.

그 가볍던 유년의 한 문장이 평생 나를 세상에 묶어둘 줄은 꿈에도 몰랐지. 처음부터 진심은 아니었다만 언제부터인가는 가짜도 아니었다. 가끔은 달의 뒷면을 보는 것이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날 때부터 손에 쥐어진 기묘한 운명 같은 것. 조금은 부끄럽지만 나를 테레사 수녀님이나 나이팅게일 같은 부류로 여긴 적도 있었다.

나는 결핍에 푹 젖은 솜 같은 어린애였다. 엄마는 어리고 예쁜 남자의 꾐에 넘어가 새 살림을 차린 지 오래였으며 상심한 아빠는 일에 과도하게 몰두했다. 아빠는 밤늦게 나가서 이른 새벽에 들어오는 일을 했다. 해가 겨우 뜬 시간 도어락 소리에 반쯤 깨 마주한 아빠의 얼굴에는 언제나 잠이 얼룩처럼 달라붙어있었다. 아주 고약하고 눅진하게.

아빠는 나를 붙잡고 자주 울었다. 우리 연재 우리 연재 하면서 서럽게도 울었다. 가끔은 그 젊은 남자 욕도 했다. 아빠는 언젠가 그 젊은 남자의 눈꼬리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찔러버릴 거라고 했다. 뱀같이 휘어지는 눈꼬리, 그 천박한 눈웃음만 아니어도 엄마가 자신을 떠나지는 않았을 거라며.

불행 아홉 개에 행복 하나 정도는 덤으로라도 끼워준다고, 그럼에도 풍족하게 클 수 있었다는 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매달 보내주는 거액으로 허기가 뭔지 모르고 살 수 있었으니 혼자서 그걸 엄마의 사랑이라 셈했다. 원망 같은 감정을 함부로 마음에 들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막 잠에 든 아빠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그릇에 시리얼을 부었다. 여덟 가지의 시리얼이 찬장을 빼곡히 매웠다.

모든 고독에 가장 보편적이고도 완벽한 처방은 적응이라고 했다.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걸 집어 들고 끝장을 봤다. 처음엔 그림이 글자보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매번 반복되는 우주괴물 래퍼토리는 금방 식상해졌다. 언제는 눈이 네 개고 또 언제는 다리가 네 개인 괴물이 매번 마음씨가 좋은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 즈음엔 조금 더 길고 글자가 많은 책을 찾기 시작했다.

졸업식에는 아빠 대신 나에게 우주를 소개해준 예전의 그 담임선생님이 왔다. 아빠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졸업식에 올 수 없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와 그 밑에서 자란 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선생님은 빽빽한 프리지아 다발을 안겨주며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 연재야, 난 네가 꼭 내 딸 같다. 엄마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다 말았다. 교장 선생님 도장이 찍힌 상도 받았다. 와인색 슈트를 차려입은 교장 선생님이 기품 있는 목소리로 상장에 적힌 내용을 읽어주었다. 학년에서 책을 가장 많이 빌린 한연재 학생에게 위상을 수여합니다. 괜스레 가슴이 두둑해진 것 같기도 했다.

교복을 살 때 즈음엔 안경을 맞춰야했다. 작은 글자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활자에는 질려버려서 중학교 삼 년은 내내 우주에 관련된 영화만 봤다. 영화를 보지 않는 시간에는 공부를 했다. 그러니까 그 무렵 내가 살던 세계는 우주였다. 지구에서의 삶은 하나도 흥미롭지 않았다. 그런 건 얼마든지 잃어버려도 좋으니 우주에 가고 싶었다. 한 점에서 생겨난 나의 진짜 세계에. 까만 배경과 푸른 별들. 수천만 개의 원자들과 작렬하는 태양. 폭발하는 흑점들. 영원히 흐르지 않는 밀키웨이. 그 세상만이 내겐 진짜였다. 이해할 수 없어도 흥미로웠다.

적어도

미쳐있는 동안은 외롭지 않았다.

한 방울 물감은 바싹 마른 탈지면보다 물을 한껏 빨아들인 솜을 기십 배 더 빨리 파고든다. 애정으로 채워졌어야 할 마음 반절이 비어있었고, 무언가는 빈자리를 채워야했다. 그러니까 집착처럼 우주에 몰두한 것도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우주영화를 전부 섭렵한 뒤에는 종이를 한 장 꺼내 계획을 세웠다. 나는 어디로 가야 달의 뒷면에 닿을 수 있을까.

그렇게 십오 년이 지나고 나는 일주일 전 우주로 가는 비행선에 올랐다.

결국 달의 뒷면은 보지 못한 채로 버려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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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유성 하나가 우주선을 스쳤다. 예전 같았으면 걱정 때문에 밤잠 못 이뤘을 일이 아무렇지 않아졌다니, 신기했다. 눈대중으로 대강 거리를 재었더니 계산이 틀렸다. 멀리 비켜갈 줄 알았는데 선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덜컥 겁이 났지만 그럴 일도 아니었다. 이승에서의 시한부에게 며칠은 절박한 어떤 것이겠지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암흑을 떠도는 나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조금 더 산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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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구를 눈에 담은 지 8, 예정했던 궤도에서 벗어난 지는 일주일이다. 이륙 23시간 후 산소탱크의 반쪽이 폭발하며 연료 탱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왼쪽 날개가 반만 남은 선체는 반동으로 인해 궤도를 벗어났다. 조종간도 말을 듣질 않았다. 함께 무전 장치도 고장 나버렸다. 수리라도 해보려 접근했지만 선이 타버려 방법이 없었다. 현실 같지가 않아 생명 줄을 다 태워먹은 사람치고는 담담했다. 처음 일주일은 모든 걸 부정하며 지구로 돌아갈 방법에 골몰했지만 전부 헛수고였다. 이제는 비상 연료도 반이 채 남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날 두고 뭐라고 떠들까. 비운의 실종된 우주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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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처음엔 마지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돌아가서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게 되고 나서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더 멍청할 걸, 앞뒤 가리지 않을 걸. 좋아한다고 말 한 마디만 해볼 걸. 가지 못한 길에 남는 후회가 진하다. 몇 번이나 목구멍을 꾹꾹 눌러 아껴둔 말이라면 더욱.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멍청했어도 좋았을 텐데.

먹은 것도 얼마 없는데 전부 게워내고 싶었다. 엉망이 된 마음에서부터 눈물이 끝도 없이 밀려나왔다. 시야가 흐릿했다가 밝아지는 일이 반복됐다. 애써 깜빡이지 않아도 흘러내렸다. 지구에는 다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뼈마디가 전부 시렸다.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인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데 지구 속에서 질식해갈 너를 생각하니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래서 네 생각 같은 건 안 하고 싶었는데. 살고 싶어 질 것도 뻔히 알고 있었는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살았고, 대부분 옳았다. 우주에 영영 홀로 남게 되었다는 비현실 같은 현실에 갇힌 후부터 네 생각을 빼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내 시작부터, 너를 만나기 전까지를 돌아보며 계속 곱씹기만 했다. 한 번 떠올리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네 얼굴 속에 갇혀 남은 시간을 죽도록 살고 싶어 해야만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너를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고 싶을 거면서. 먼발치에서라도 좋으니 보고 싶을 거면서. 영영 보지 못해도 좋으니 같은 하늘 아래 숨쉬기만 해도 좋겠으면서.

부러 좋아해라고 뱉어본다. 공기가 없으니 소리도 없다. 뻐끔거리는 나, 전하려 했던 마음 그리고 입술을 움직였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이젠 뱉으려던 말을 삼킬 차례다. 혀뿌리를 꾹꾹 누르며 터질 것 같은 심장에게 말한다. 헛된 희망 같은 거 버리라고. 나에게도 닿지 않는 것이 네게 닿을 리 없다. 심연 속에서는 혀가 자꾸만 덩어리처럼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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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머릿속에 두 종류의 전파가 송신된다. 손수건 위에 엎질러진 물처럼 한 번 내게 쏟아진 너는 마를 생각도 없어 보인다. 종일, 개성 강한 두 채널이 쉬지도 않고 떠들어댄다.

나를 잊어줘. 나를 네 기억 저 뒤편으로 보내줘. 나를 두고 슬퍼하지 말아줘. 아니야, 추억해줘.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려줘. 우리를 매일 생각해줘. 잊을 만 하면 오는 다음 계절처럼 나를 기억해줘. 가끔씩은 눈물 흘려줘. 다시는 하늘 따위 올려다보지 말아줘.

온통 말들이 섞여 혼란스럽기만 하다. 두 전파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을 때쯤 입을 모아 말한다. 보고 싶어. 못 견디게 그리워.

달의 뒷면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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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끝이다.

.

.

.

연재가 출발하고 첫 10시간 동안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초조해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도리어 미칠 것 같았다. 다리를 떨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리만 지켰다. 선체는 이미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나는 할 수 있는 계산을 이미 전부 했다. 한 번 할 것도 스무 번 씩 했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간헐적으로 큰 숨이 터지듯 쉬어지고 내내 입술이 말랐다. 그 다음 열 시간 동안은 목만 축이고 앉아 자리를 지켰다. 연재는 여섯 시간에 한 번씩 영상을 송신했다. 그러니까 네가 하늘로 쏘아 올려진지 23시간째, 마지막으로 걔를 눈에 담은 지가

정확히 세 시간 하고도 사십 팔 분 된 시점, 네가 없는 지구에 그제야 조금 적응했을 무렵, 고막을 찢을 듯 비상벨 소리가 울렸다.

불안한 예감이 온 몸의 구멍을 타고 들어와 온 몸을 점령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삽시간에 맥박이 빨라졌다. 헤로인을 구하지 못한 말기 중독자처럼. 손에서 자꾸만 페트병이 미끄러졌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산소탱크가 폭발했어요. 선체 날개의 반쪽이 날아갔어요. 비행선이 궤도를 벗어났어요. 무전이 끊겼어요. 분명 수 없이 들어본 말인데, 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지.

[긴급 속보입니다. 지난 8일 대한민국 국적의 RSA 소속 한연재 우주비행사가 탑승한 AF 27호의 산소탱크가 이륙 23시간 후 폭발하며 동시에 연료 탱크마저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항공 당국은 폭발 20분 후 공식 회견을 열어 산소탱크가 폭발된 그 즉시 한 씨와 무전이 끊어졌으며, 현재 그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만약 한 씨가 생환하지 못한다면 장례식은 한국과 러시아 양 국에서 동시에 열릴]

당장 티비를 끄라고 국장에게 소리쳤다. 목구멍에서도 눈물이 차올라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이쪽은 수. 풀 네임은 조수지인데 전부 수라고 불러. RSA러시아 연방 우주국에서 가장 젊은 엔진 디자이너. AF 27 엔진도 수가 디자인했어. 서로 알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수가 앞에 선 연재의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연재는 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생각했다. 소문이랑은 좀 다르다고. 성공 가도만 내리 달려온 냉철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런 사람치고는 눈동자가 까맸다.

외국의 인텔리 집단에 이름을 올린 동양인에게는 두 가지가 동시에 요구됐다. 콧대 높은 그들을 압도할만한 능력과 비주류임을 극복하고도 남을 인간적 매력. 겉으로만 관대해보일 뿐 한 꺼풀만 다가가도 금방 냉랭해지는 게 그들이었다. 모두 제 파이를 지켜내려 두 세 겹으로 벽을 쳤다. 그들과 같아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게 뛰어나야했고 약점 하나 찾지 못하도록 완벽해야했다. 그런 점에서 수와 연재는 평생을 외로웠을 사람들이었다. 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짧게 다듬은 손톱이 정갈했다.

-조수지입니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얕은 공통점에 들떠 마음을 내주는 어리석은 짓은 이십대 초반에나 했다. 그럼에도 타국에서 만난 고향의 언어는 마음을 매번 무르게 했다. 연재가 다가온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한연재예요. 잘 부탁해요.

기억으로조차 남지 않을 가벼운 통성명이 인연의 끝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수와 연재는 그 날 이후 서로에게 예고 없이 대기권에 진입한 유성처럼 굴었다. 서로를 알기 전에는 어떤 날들을 보냈었는지가 가물거릴 만큼. 큰 스크린에 영화를 틀어놓고 직접 튀긴 팝콘을 뒤적거렸고, 그 팝콘을 서로 던지며 놀기도 했다. 그러다 도저히 눈꺼풀을 이길 수 없어지면 연재는 수의 꼿꼿한 무릎을 베고 잠에 들었다.

또 달이 유난히 밝은 밤에는 산책길에 나섰다. 수의 클래식한 머스탱을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내달렸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도로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항상 전조등을 켰다. 차를 공터에 대고 보닛 위에 나란히 누워 별을 세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가장 빛나는 별을 가리키며 서로의 이름을 붙였다. 그럴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흘러가는 시간의 옷깃을 끌어당겨 멈춰달라고 슬쩍 부탁하면 들어줄 것도 같았다. 시린 밤공기가 허파를 연신 파고들었다. 웃음이 내리 터져 나왔다.

그 즈음엔 이례적으로 평화로웠다. 언제나 굵은 손가락이 기도를 막고 있던 것 같던 지난 십 수 년이 무색하도록. 달 탐사를 정확히 일 년 앞둔 시점엔 많은 것들이 마무리 되어있었다. 한가한 연재와 달리 수는 그 무렵 한창 바빴다. 연재가 타고 떠날 AF 27호의 엔진에서 작은 문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네 번 꼴로 아침 일찍 회의를 했고 여섯 번 꼴로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를 두드리다 엎어져 잠에 들었다. 종일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메시지 한 통 주고받지 못했던 날이면 연재는 어딘가 한 구석이 허했다.

관계의 반환점은 타이밍을 잘못 잡고 찾아왔다. 비행이 삼 주 남은 시점, 수네 집에서 홈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홈 파티라는 말도 우스운 게 그 무렵엔 그게 일상이었다. 집을 합치다시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수는 마당이 있는 주택에 혼자 살았다. 드레스 룸과 침실, 홈시어터를 마련하고도 방이 남아 공허했다. 수에게는 온기가 필요했다. 러그를 깔고 벽난로를 켜도 춥다며 내내 양 손을 비볐다.

연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집은 반쯤 비어있었다. 회사에서 고작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수의 집이 위치했기 때문에 만들자면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연재는 수와 눈 뜨는 일상이 좋았다. 해가 뜨면 잠이 없는 수가 연재를 깨웠다. 미리 끓여놓은 오트밀을 데워 한 두 숟가락 억지로 뜨게 하고는 보폭을 맞춰 걸으며 회사로 향했다. 수는 물컹한 오트밀보다 바삭한 시리얼을 더 좋아했지만 연재는 시리얼을 먹으면 열 번 중 여덟 번 체했기 때문에 군말 않고 매일 오트밀을 씹었다.

그 날의 메인 디쉬는 스테이크였는데 날이 무뎌 잘 썰리지 않았다. 칼을 위아래로 열 번은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한 조각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수가 짙은 색의 레드 와인 한 병을 식탁 위에 놓았다. 병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코르크가 수의 손에서 쉽게 부서졌다. 잔을 반쯤 채운 와인을 입에 갖다 댔다. 그날따라 유난히 떫고 시었다.

한번 코끝에 물든 향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피곤해? 수가 오른손으로 연재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말했다. 손이 스쳐 지나간 두피가 저릿했다. 새벽이라도 된 양 금세 아득해졌다. 마디 끝마다 위치한 모세혈관이 전부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 온 세상이 쿵쿵거렸다.

아니, 입술만 달싹여 대답을 뱉었다. 목구멍부터 창자까지 순식간에 사막처럼 마른 것 같았다. 입술 끝에 좋아한다는 말이 터질 듯 매달려 있었다. 감정의 자각은 실로 대단했다. 순식간에 세계가 뒤집어진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 감정이 몇 십 년을 살아오며 배웠던 단어들을 한 순간에 휘발시켰다.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냥

걔가 꼭 내 세계 같았다. 아홉 살 때부터 바라오던 우주 따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심란한 마음은 뒤로 밀어둔 채로 월요일이 세 번이나 지났다. 어느새 일곱 시에도 해가 지지 않는 계절이었고, 그 날은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삼 주 내내, 연재는 사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첫사랑에 빠진 뜨내기 같았다. 훈련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멍청한 얼굴로 하루를 보냈다.

사실 첫사랑도 맞았고 뜨내기도 맞았다.

마지막 밤, 수는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벌써 자정이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연재가 자고 있는 방의 문과 문턱 사이로 옅은 램프 빛이 새어나왔다. 슬쩍 문을 밀어젖히고 침대 맡으로 가 덜 마른 연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축축한 물기가 손가락 사이로 느껴진다. 무사히 돌아올 거지?

연재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 꼭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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