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감정을, 감정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붙잡고 싶었던 건 네가 아닌 그 순간 이었다. 이미 예정된 한순간 속의 우리들
<이향- 한순간>
무턱대고 그리운 순간이 있다.
그리움-김영석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갈 꽃이 바람에
애타게 몸 비비는 일이다>
<저물녘 강물이
풀뿌리를 잡으며 놓치며
속울음으로 애잔히 흐르는 일이다>
정녕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은
<산등성이 위의 잔설이
여윈 제 몸의 안간힘으로
안타까이 햇살에 반짝이는 일이다>
그리움이 잡힐 듯 말듯한 '간절함'으로 나타나는 사람.
그렇다면 나의 그리움은 어떨까?
그리움을 내 식대로 거침없이 풀어내자면,
내가 그 순간 느껴었던 감정이 심장 속에서 맞부대껴 서로 충돌하고, 요동치고 울렁 거리는 거 같다.
그리움이란 게 해소가 되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다.
해소가 되는 그리움은 이를 테면 곧이라도 만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엊그제 느꼈던 감정, 그 사람이 변하지 않았을 때에 누릴 수 있는 사랑과 같은 그리움.
해소가 되지 않는 그리움은 이를 테면 나의 울타리를 벗어난 양이다. 나의 울타리는 양들을 가둘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양들의 완벽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들은 그저 나에게로 걸어와 마음이 맞으면 쉬어가고 아니면 떠나간다. 나는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뿌리가 박힌 나무일 뿐 거쳐가는 모든 것들은 잡을 수 없다.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 양은 울타리 안에 앉아있고, 누구보다 편안한 얼굴로 선선한 바람을 맞는다. 이런 완벽한 상황이지만 평생 햇살을 쬘 수 없고 양은 자기 나름대로 갈 방향이 있다.
해소가 될 수 있는 그리움은 나는 간절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쁨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해소가 되지 못하는 그리움도 나는 간절함을 가질 수 없다.
필요가 없다와, 가질 수 없다. 미묘한 차이는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
내가 유년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떄의 즐거움을 똑같이 누릴 수 없다.
어릴 적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던 컴퓨터 게임이, 지금은 왜 이렇게 유치한지.
분명 그 때는 가장 좋아했던 놀이 였는데.
'어째서?'
나는 묻고 싶다. 왜 나는 색칠공부가 재미 없어지고, 흙놀이가 별로여지고, 술래잡기가 시시해졌는 지를.
해소 되지 않는 그리움이 쌓여 갈 때는 나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기 위해 애쓰거나 애쓰지 않는다.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떄가 있고 그 떄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미련이 고인 물처럼 남아 있을 적도 있다.
기억이 감정을, 감정이 기억을 일으킬 때면
그립다.
한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뭔가를 좋아하고 열정이 있던 그 때 그 순간이 그립다.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정신 없다가, 다시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그립다.
그리움이 더해지고 더해진다.
박지헌의 보고 싶은 날엔을 벨소리로 해놓았던 그 때 정말로 좋아했던 친구가 연락 올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보고 싶은 날엔 만 들으면 설레인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5월 달에 새로 사귄 동기 여자친구와 간만에 마음에 드는 곡을 찾았다며,햇볕 맞으며 벤치에 앉아 함께 듣던 가르마와 이백퍼센트.
그리고 일학기 내내 뿌리고 다닌 안나수이 향수 냄새를 맡을 때 마다
나는 다시 삼개월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나의 엄마는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면 '엄마는 예전에 실컷 먹어서 이제는 안 먹어도 돼' 하신다. 그럴 때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 얘기를 꼭 하신다. "엄마가 예전에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을 너무 맛있게 먹었어. 그걸 한 번에 열개 씩 막 먹었는데 회사 사람들이 쪼그마한 게 많이도 먹는다고 할까봐 그만 먹었는데 그냥 입에 넣으면 녹았어. 그 때는 어찌나 맛있었는지. 정말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졌다니깐?" 벌써 네번은 더 들어서 오뎅의 모양이 어땠고, 당시에는 오뎅을 어떤 식으로 팔았고 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 오뎅을 일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다. 왜? 이제는 눈치볼 사람도 없고 돈도 있는데?
엄마는 오뎅이 좋았을 때가 사라진거다. 하지만 그 때 추억이 그리움처럼 남아서 딸인 나에게 몇번이고 얘기하신다. 번외편으로 떡볶이도 있다.
그리움이 결코 나쁜 감정은 아니지만, 다신 찾아올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고 다시 그 때로 돌아가기 원하냐고? 아니다. 못한다.
나는 어릴 때의 나처럼 그 당시를 가장 나답게 재미있게 즐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떄로 돌아가 나의 감정을 아쉽게 하고 싶지 않다.
단짝 친구가 이제는 마주쳐도 인사 하고 헤어지기 바쁜 남남이 되었을 때
나는 그 때의 그리움을 찾고 싶다. 하지만 지금 너를 붙잡아 '다시 너와 돌아가고 싶어' 해도
이미 우리의 공백에는 서로의 많은 것들이 채워졌고 틈새는 벌어졌다.
연락 좀 해. 하기도 지치는 순간에 나는 너를 포기하고 있었다.
과연 죽을 때 까지 연락할 만한 친구가 있을까? 내 삶은 길고, 긴데.
그래서 나는 이향의 시에 공감한다. <이미 예정된 한순간 속의 우리들.>
그리움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가, 나에게도 찾아올까?
그립다는 게 그리운 때가 다가올까?
시간은 일직선상으로 곧게 흘러가고
나의 스무살이 그리운 날이 분명 오고
그 때 이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리움에 파묻히지 않게 내 주위에는 즐거움이 가득 하길 바란다.
즐거움이 내게는 감기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감기약에 적응하면 더 강한 약을 써야 치료가 되는 것처럼.
그렇지만, 더 큰 바이러스가 몰려올 때면 더 큰 즐거움이 내게 생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