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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생활문/수필

제목 가정법
글쓴이 강유미
가정법

트루먼쇼는 가정법입니다.
‘바다가 사실은 거대한 인공 수영장이고, 가족은 베테랑 연기자들이라는 가정을 해본 적이 있나요?’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 물음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나요?’ 라는 질문처럼 느껴져요.
상상하기 싫은 상실감이 다가옵니다.

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값비싼 거짓이거나 휘황찬란한 가짜라면
나는 네가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기꺼이 환하게 속아넘어 가주마
함부로 애틋하게 속아넘어 가주마

트루먼쇼를 보면서 유정희 시인의 함부로 애틋하게 라는 시가 떠올랐어요. 많이 공감도 했구요. 완벽하게 트루먼을 속아넘겼다면 트루먼은 행복 속에서 눈감을 수 있었겠지요.

트루먼은 파도 때문에 죽었던 아버지를 군중 속에서 발견해요. 속임을 알게된 트루먼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바다의 끝에서 진실로 나아가는 문을 발견합니다. 문 앞에 선 트루먼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진실을 의심한다는 가정법은 잔인합니다. 수많은 가정들은 믿고 있는 사실과는 판이하니까요. 거짓은 너무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가정을 해볼까요? 일주일에 한번씩은 만나는 모모양이 나를 엄청엄청 싫어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녀요. 하지만 나는 모모양의 진실도 모른채 모모양을 엄청엄청 좋아하는 걸로 평생 사는 거에요.
끔찍해요. 그렇지만 나는 모모양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을 거에요. 하지만 가정만으로도 배신감이 치솟고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하나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드는데 과연 내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면? 과연 트루먼처럼 진실로 향하는 배로 항해할 수 있을까요?

삶에는 어느정도 가정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의심이지만 나를 죽어있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트루먼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함부로 애틋하게’ 속아 넘어가주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끝까지 속이지 못할 것이라면 가짜는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는 쇼는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속이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내가 눈치 채기 전에 떠나주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