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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4) 나가면서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題銘이 걸려 있었다 한다. 미지의 심적 세계가 융이 설명하듯이 집단적 무의식의 세계이든, 프로이트가 설명하듯 원초 자아의 세계이든 문학을 통해 우리는 그 심적 요소를 탐색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심리치료에서는 무의식의 그림자와 자기와의 균형이 깨진 상태를 병리적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는 부조화에서 비롯된 내면의 그림자를 재인식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문학(독서와 글쓰기)은 진단적 용도와 치료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문학을 통해 치료자/상담자는 환자/내담자가 어떤 심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갈등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다. 독서의 내용을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으며, 어느 부분을 망각하고, 어떻게 변화시키고, 얼마만큼 추가하는지를 관찰하면서 환자의 심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또한 글을 쓸 때도 (위의 코끼리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사소하게 다루며, 어떤 (무의식적) 주제를 부각시키는지를 통해서 고착된 심리, 퇴행된 심리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독서나 글쓰기를 통해서 투사한 이미지와 심리 역동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환자/내담자/독자는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이것이 치료적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의 해석이 리쾨어의 말을 빌면, “그 해석자 자신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제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문학 이론적 가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가 호소구조이며, 미정성과 부정성에 근거한 표현인 반면, 독자/화자는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 표현을 자신의 의식 속에 표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또한 문학은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구분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시민적 일상을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소외되고 고통을 얻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문학은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치료의 효과에 대한 임상결과에서(파르덱에 따르면 문학 치료가 자기확신, 태도변화, 자기성취, 감정결손 환자의 치료에는 긍정적 효과가, 학습효과, 부부/성 관계, 불안해소 등에는 부정적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보듯이 (비록 국부적이고 특수한 경우라고 치부하더라도) 문학의 효과가 어느 일정한 면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문학의 치료 기능이, 나아가 문학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문학의 존재이유를 말해주기도 하는 바, 문학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문학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적합하지 않고 (아마 음악과 같은 다른 예술수단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인 문제(고독, 중독, 자기확신 등)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이론이 - 그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 체계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문학의 언향적 행위 perlokutionäer Akt를 무시하고 그저 사회적 준거라는 담론적 diskursiv 형식(아도르노, 뷔르거, 루만, 골드만 등)에 머물거나, 내재적 준거라는 현시적 präsentativ 형식(프라이, 야우스, 슈타이거, 카이저 등)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문학은 이제 19세기 정신과학의 유산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변했다.

정리하자면 메타이론에 대해서 우리는 심미적 경험이 우위라는 것과, 심미적 경험은 일차적 경험의 허와 실이 분명해지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이 일차적 경험을 우리는 때로 감성적 경험이라고도 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심미적 성찰을 주장하는 문학이론에서 자칫 수준 낮은 교과서적 해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쉬운 대목이다(이것 때문에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면이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모든 성찰을 통한 학문이 물 떠난 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