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마당 > 부모/교사 독서치료 > 독서치료이론

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문학치료란?
변학수 (경북대 교수·문학평론가)

(대한의사협회 부설 의료정책연구소의 계간지 의료정책포럼 2003년10월호에서 발췌)

근대의 서구에서는 문학을 글자로 쓰여진 말로 제한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을 영상으로 옮기면 그림이나 영화가 되고, 동작으로 옮기면 연극이 되며 소리로 옮기면 음악이 되는 문학을 글자로 제한한다는 것은 우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말로 구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학이 갖는 현대의 심미적 기능은 원래 원시사회의 종교적 기능을 대신한 것이다. 문학은 그 본래의 기능상 인간의 영혼이나 심리를 치유할 의식(儀式)의 수단이었고, 일차적으로 감정과 사고, 의지를 중심으로 한 심리적-정신적 행위의 소산물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병리학이 정신적 질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질병의 치료술이 종교의식과 결부되어 환자들은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이나, 사원, 토템, 샤머니즘적 성소를 찾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비근한 예로 팔공산 갓바위에 가보면 그런 유형의 질병치료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또는 그런 시간에 기도를 드리면 실제에서건 상상에서건 병에 차도가 있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낫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인간이 계몽되면서 해부학적 지식과 과학적 증거의 도움으로 정신의 힘에 대한 신뢰는 많이 떨어지고, 실증적이고 국부적인 힘에 대한 신뢰가 지배적으로 남게 되자 정신적 효능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부분으로 축소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정신의 자연치유능력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그런 능력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의적이고 마법적인 정신의 소산인 문학을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치료의 방법에 적용시킨다는 문학치료의 의도가 완전한 패러독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패러독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손치더라도 그 패러독스를 극복하는 것이 소위 말하면 현대의 대체의학적 마인드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제 가능한 영역, 즉 의학으로 통제가능한 영역에서 정신적인 것을 수용하자는 것이 필자가 지금 쓰고자 하는 대체의학으로서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하나: 그러면 문학이란 무엇이며 문학치료란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서구에서 문학의 본래적 기능이 하나의 이성작용으로 넘어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생되었는데, 그 이후 문학에서 중심개념이 되어온 예술/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점차 축소된 것 같다. 문학이 종교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퇴색하면 할수록,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그것의 후기 문화적 기능인 예술이 퇴색하면 할수록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다. 원시제의에서는 고통이 있었기에 비극이 있었고 이는 중세나 근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여인이 자식을 데리고 시어머니에게서 쫓겨나 산 넘어 다른 남자에게 개가를 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남자는 성불구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첫 결혼에서 난 딸이 하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옛정을 못 이겨 새벽이면 일어나 하얀 치마를 걸치고 마실(마을)을 간다. 그것을 딸에게 들킨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딸아이 입을 막아 죽이게 되고 그것을 목격한 아들까지 갖다 버린다. 죽은 두 아이는 원혼이 되어 엄마를 찾아와 괴롭힌다. 엄마는 할 수 없이 푸닥거리를 하고 원혼을 달랜다. 여기에서 씻김굿 같은 노래가 나오고, 여기에서 원혼을 달래는 말이 나온다. 이때의 말이 어찌 일상의 말이겠는가. 고대의 제의에서나 중세의 삶의 현장에는 어떤 탄원이 있었고, 그 탄원이 곧 카타르시스 해야 할 실체였다. 카타르시스를 재귀적 과정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이론은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킨 뒤에 관객 자신의 연민과 공포를 다시 몰아낸다는 뜻을 피력한다. 그 여인에게 한을 품은 어린 두 자식의 모습은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을 터이고 무당은 그 귀신을 쫓기 위하여 칼과 징과 울긋불긋한 복장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이런 치유방법은 고대의학에서 쓴 동류요법(同類療法)과도 같다. 근대의 길목에서 프로이트 또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였다. 즉, 그는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최면 하에 회상함으로써 신경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요법을 "정화요법"이라 부른 것이다. 비극/문학/예술 경험은 실생활에서 경험했다면 고통스러웠을 터이나 비극/문학/예술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이 즐거움은 깨달음, 즉 인식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인식은 또 사건진행과 구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발견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문학의 기능은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문학이론은 카타르시스 기능보다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기능을 강조하고, 또한 후현대로 오면서 문학이 점점 더 성찰의 성격을 띠면서 카타르시스 기능은 등한시되었다. 이렇게 보면 문학의 기능은 카타르시스와 아이스테시스란 개념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치료에서 인지치료와 감정치료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은 구도로서 어느 것이 다른 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기능이 문학치료에 어떻게 응용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문학치료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독서치료 Bibliotherapy (Biblion=서적, 문학 therapeia=치료, 치유)와 글쓰기치료 Poesietherapy (poiesis〉poietike 만들다, 글짓다)이다. 환언하면 문학치료는 문학, 즉 읽기와 쓰기를 통한 치료라고 말할 수 있다. 독서치료(Bibliotherapy)는 책읽기(문학, 인생경험담, 치유경험, 영화 등)를 통해서, 글쓰기치료(Poetry therapy)는 텍스트 만들기(시, 산문, 연극, 일기, 편지, 고백록 등)를 통해서 가능하다. 문학치료는 협의의 의미에서 보면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키틀러(Kittler)와 문첼(Munzel)의 정의에 따르면 문학치료는 의학이나 정신과 및 심리치료적 진료에 수반되는 대안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문첼이 책읽기 자체만으로도 문학치료가 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코르넷(Cornett) 은 문학치료의 개념을 일정한 조건 하에서 이해하고 있다. 코르넷이 의미한 문학치료는 계획된, 환자의 일정한 문제를 겨냥한, 그야말로 목적의식을 갖고 전개되는 치료를 뜻하고, 문학치료에서 구체적인 문제라고 보는 병이나 병적 소인으로는 1. 사회적 불안, 시험에 대한 불안 2. 우울증 3. 분노, 공격성 4. 성적 장애 5. 심리장애적 심장병 6. 자기불신 7. 술, 담배, 마약중독 8. 이성문제 9. 언어장애 10. 부적응아 등이다. 그러나 필자는 확대된 의미의 문학치료를 의미할 뿐 아니라 독서와 글쓰기를 확대된 의미에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구체적 병인에 대한 치료(therapy)까지를 의미한다.

둘: 문학치료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나라에서 문학치료의 이론적, 실제적 토대는 아직까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몇몇 학자들이 독서치료나 문학치료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 외국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도 현대 한국인의 문학적 성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상담이나 또는 그냥 문학감상 정도의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약물치료 분야에서 선구자로 이미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치료 측면에서도 전문가인 페촐트(Petzold)가 현상학적, 심리분석적인 입장에서 문학치료 분야를 지속적으로 개척하고 있다(페촐트와 오르트(Orth) 1985). 특히 그는 메를로-퐁티(Merleau-Ponty)의 프랑스 현상학파와, 라캉(Lacan)의 심리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치료효과들에 대한 원리는 모든 심리치료 이론과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이런 이론적 계획에 대한 임상심리학에서의 포괄적이고 모델 이론적인 방향제시는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필자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유럽의 존재론적 정신병리학적 방향보다는 물리치료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상담학, 사회복지학, 교육학, 문헌정보학과 같은 유사한 학문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서치료나 문학치료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방향은 문학치료와는 약간 거리가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소위 말하면 외과수술이 아니라 화장술(化粧術)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 혹은 글읽기가 지속적으로 심리적인 효과 면에서 실효를 거두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마음의 "평정", "확신", "안정", "긴장완화"와 같은 것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텍스트에서 감명을 받게 하고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떤 동기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가 수용-인지 영역에서 흥미를 일깨우고 새로운 "인식"이 자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문학치료는 최소한 이원적 형식, 즉 감정과 인지의 형식에서 모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독일에서는 특히 치옴피(Ciompi)(1985)가 "감정 논리 (Affektlogik)"란 개념으로 정신분열증의 심리병리학 이해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였다. 그는 논문에서 심리 분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론적, 심리적 측면 또한 설득력 있게 통합시키고 있다. 그가 제시한 이론의 구조는 자기(자기대리자 Selbstrepräsentanzen)와 주변(대상대리자 Objektrepräsentanzen)으로 구성되어 있고, 긍정적(재미있는), 부정적(혐오적인, 공격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즉, 감정적 통합은 자신과 환경을 구별하는 것과 동시에 발생한다. 감정적 통합과 인지적 구별의 과정이 불균등하게 발전할 때 심리병리학적으로 중요한 "상처"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이 상처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경직되고 병적인 소인이나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란 결국 이런 여러 요소들로 구성된 요인들을 재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선 병리학적인 특성을 지닌 에너지(氣)를 방출하거나(카타르시스) 인지적 양상을 강화하고(통찰) 구조적 안정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이 치료적 효과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문학을 통해 정서적, 인지적 영역에서의 재편과정이 작동해 새로운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한다. 인지, 생각, 기억, 느낌, 욕구, 행위 등은 심리적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심리모형의 구조적 특성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부정적 자기상(自己像)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부정적 인식 내지는 부정적 생각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문학치료의 목표는 자기 자신에게서 긍정적인 것들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들은 서두에서 제시된 실례에서 보았듯이 말(문학)과 연결되어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은 습득된 이차적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일 뿐 아니라 일차적 기호체계로서의 그림언어를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음악치료나 미술치료에서는 문학치료와는 달리 일차적 기호체계를 특수하게 사용하여 영상의 영역이 활성화된다. 이에 반해 문학치료는 이런 예술수단의 치료보다는 간접적이고 이차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역으로 예술이론에서 차지하는 문학이론의 차별성에 적용시킬 수 있다. 물론 심리치료에서 분석적-과학적 방법이 창조적 치료 영역에서 그 효과가 의문시되고 요가나 굿거리, 선 같은 동양적, 정신적 방법을 더 나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여기에 문학과 치료로서의 문학수용이 그 절대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숨어있다. 그러나 문학의 기능이 그렇게 단순하고 막연한 영역만은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심리학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심리치료의 현장 사이의 복잡 미묘한 긴장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문학치료의 다양한 방법에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상호 통합적 측면에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술과 학문이 동시에 가지는 (즉 어떤 처방으로서의 치료와 이론적 바탕으로서의 치료가) 딜레마 또한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병력은 사실이어야 하고, 또한 있는 그대로 서술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의 텍스트는 신빙성이 있어야 하는데 문학텍스트가 현실적으로 신빙성 있는 실체가 아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치유 체험을 기술한 텍스트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학치료가 굿거리 같은 신빙성 없는 치료방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통제장치가 필요하다. 일단 주관적 설문 문항표를 통해 감정이나 인지의 변화를 수치로 잴 수 있는 객관적 감정지수도표를 도입할 수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세부적인 것은 정신과의 의사가 여러 의료기기에 힘입어 측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학치료의 한계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1) 우선 음악치료나 미술치료는 단순히 듣거나 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훨씬 접근하기 쉬운 반면, 문학치료에서의 독서나 글쓰기는 비교적 수동적인 수용자세를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독서나 글쓰기가 고통스럽고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2) 허구적 상황들이 들어있는 문학 텍스트는 ― 체험적인 글에 비해 ― 현실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이상적 세계를 지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3) 문학텍스트에 나타나는 어려운 상황이나 탈출구가 없는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울증이나 좌절감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 그런 경우 의사들은 약물치료를 권하기도 한다. 4) 문학치료의 실례들을 살펴보면 어떤 문학텍스트는 환자에게 잘못된 인생목표를 설정시켜 그 환자를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길의 이면에 문학의 성과가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문학(독서치료의 수단이 될 책들을 분류해보아야 한다. 책을 먼저 구분해보면, 1) 문학성 있는 작품들 (시, 꽁트, 단편소설, 장편소설, 동화, 드라마 등), 2) 개인적인 글(위기극복이나 체험이 든 수기, 넌픽션, 드라마), 3) 교육목적으로 쓴 극복방법에 관한 책(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 책들, 암투병기, 술·담배끊기, 마약 극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협의의 의미에 있어서 문학(독서)치료는 3-2-1 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곧 당해 글이 지니는 문학성, 즉 문학의 완성도와 반비례한다. 그러나 독서 전략적인 차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2항과 3항의 책을 읽는 사람이 1항의 책도 읽는다는 점과 1항의 책을 읽는 사람은 2항과 3항의 글이 지니는 상황을 표상하지 않고는 1항의 글들이 심미적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면 이런 문학치료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 1) 치료사는 책/글의 내용과 내담자의 상태(정신적, 육체적, 감정적 상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치료사는 내담자와 유대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비밀 같은 것을 철저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2) 문학치료를 받을지 다른 예술 수단일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환자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3) 상담자는 선택한 책/글의 수준을 환자와 맞추어야 한다. 4) 억압이 아닌 상태에서 환자가 책을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상태로 가기 위해 다른 수단 (영화나 다른 사람의 조언 등) 을 사용할 수 있다. 5) 환자의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치료할 것이며, 또 어떤 상태에까지 진행해야 할지는 의사와 협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런 전제조건은 결국 문학 이론이 충족해야 할 내포 독자(der implizite Leser)와 깊은 관계에 있다. 2)번의 경우, 독자 분포도(베스트 셀러, 문학창작의 지표 등)와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문학을 매개로 한 철학이나 사회학적 인식을 조정할 수 있거나 새로운 문학 담당층에 대한 연구를 참고로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3)번의 경우도 사회적, 문화적, 계층적 독자의 전제 없이는 문학의 이해가 공허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교육에서 정전이 마련되듯이 문학치료 또한 일정한 패턴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러한 패턴이 형성되어야 치료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문학치료에 효율적인 문학텍스트 목록을 선정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서구에는 그런 목록이 이미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심리법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점이 충족될 경우, 문학치료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진행될 수 있다.  

1) 진단과 상담단계: 이 단계에서는 우선 책을 읽게 하거나, 글을 쓰게 하고(시, 산문, 일기, 수필 등의 형식으로) 일주일쯤 후 개별면담이나 그룹별로 읽고 쓴 것을 이야기하게 한다. 상응하는 텍스트를 선별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텍스트는 치료에 대한 비현실적인 공포를 조장하여 환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내면적 고백 같은 경우에도 공공연하게 적시하여 명예감을 손상하거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상세한 문헌이나 문학서적, 글쓰기의 실례, 또는 목록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전형적인 문학을 이용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 이 단계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상징단계라 할 수 있다. 고통이나 외상(trauma)이 무질서하게 어렴풋이 떠돌아다닌다. 언어로 하자면 생략부호나 앞뒤 말이 되지 않거나 논리적 모순, 모호함, 엉뚱함 등의 언어상태이다. 치료사는 진단하거나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사소한 것 모두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해 두어야 한다.

2) 해소단계: 환자의 의사에 따라, 그리고 진단한 증상이나 질병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의사와 상의하여) 문학을 선정하여 읽어주거나 읽게 한다. 그 다음, 내용 가운데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는지를 물어 보며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을 때는 억지로 할 필요가 없고, 또 일방적으로 환자가 이야기만 하면 그대로 들어주는 것도 해소의 일환이다. 이와 함께 문제성을 치료사와 내담자가 같이 인식한다. 즉 문학의 주인공이나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능동적인 해소 단계의 일환이다. 만약 이러한 것이 큰 효과를 못 볼 경우 다른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 예를 들면 영화 비디오를 보여 주거나 술꾼 시인(천상병이나 보들레르, 요세프 로트의 삶에서와 같은)이나 마약중독 시인(트라클), 정신분열증의 작가들(니체, 횔덜린) 같이 병력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주의력을 환기시킬 수 있다. 이 단계는 거의 동류요법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상징단계와 은유단계의 복합적 단계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표현의 동물(homo expressionensis) 라는 것은 표현하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없다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지속된다면 병이 된다. 그러므로 이 해소단계에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반은 치료한 것이다.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 그것을 말이나 몸짓, 동작, 노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의 시작이다.  

3) 치료단계: 실제 병원에서는 이 단계에서 다양한 독서를 권장하고 그것을 환자에게 과제로 부여한다. 이를테면 자기의 최초의 인식과 독서 후의 인식이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지, 왜 그렇게 바꾸었는지를 말하거나 기술해 보게 한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오인 (meconnaissance)을 재인식(reconnaissance)으로 바꾸는 과정과 같다. 문학치료는 우선적으로 언어적(verbal) 표현에 중점을 두지만 미술치료 같은 데에서도 주목해야할 비언어적(nonverbal) 표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거꾸로 미술치료나 음악치료 또한 그것을 언어적으로 말한다는 데서 언어적 표현을 간과할 수 없다. 쉽게 말해 이성적으로는 언어적, 감성적으로는 비언어적 표현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문학 또한 말로 하지만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언어적 수단을 넘어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나 융이 내세운 전통적 정신분석학에서 간과하고 있는 상징의 가치판단이다. 흐릿하고 불분명한 언어적 그림이 상징이라면 은유적 그림은 구체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상징의 이미지는 환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미지이자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인데 반하여 은유적 이미지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구체적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상징이 사고 이전에 발생한 이미지라면 은유는 사고 이후에 발생한 이미지이다. 상징이 이미 알고 있는 이미지라면 은유는 알 수 없는 이미지이다. 상징적 이미지가 우리의 사고를 경직시킨다면 은유적 이미지는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징을 부정하기도 한다. 상징 이미지가 항상 같은 것이라면 은유적 이미지는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을 말해주는 다른 것이다. 상징 이미지는 설명이 가는 것이지만 은유 이미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데 일상언어와 예술언어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정호승의 「그리운 부석사」에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있겠느냐" 앞의 구절은 상징적이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라는 유행가가 있듯이 상징 이미지는 항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뒷 구절 비로자나불은 시인 특유의 은유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이 시구를 읽은 독자는 또 다른 은유 이미지를 택할 것이다. 글쓰기 치료에서는 바로 그 은유적 이미지를 겨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에 실패한 과거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거기 비문에다가 "○○○를 사랑하다가 죽은 ○○○의 무덤"이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 이미지는 단숨에 만들어질 수 있지만 은유 이미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솔직한 감정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상징 이미지는 빨리 서술될 수 있지만, 은유 이미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상징 이미지는 주된 사건에만 집중하는 데 반하여 은유 이미지는 환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굴절한다. 그래서 상징이미지는 글을 쓰는 동안 해석되거나 설명될 수 있지만 은유 이미지는 다 서술할 때까지 어떤 유사현상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징 이미지는 제한되어 있지만 은유 이미지는 끝이 없다. 환자에게 이런 다양한 독서의 인식을 권장하고 그 결과를 재평가하게 하는 것이 치료의 단계에서 일어난다.

셋: 문학치료의 사회적 통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런 문학치료가 몸담을 수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만약 양심이 중요하다고 본다면 그 양심이 법률적으로도 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을 한 사람에게 법률적 구속이 없다면 그것은 양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치료의 수단으로서의 문학이 현실에서 주술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존재에 대한 논의는 공허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학치료가 대체의학으로 시급한 이유를 우리 사회가 정신병리학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진입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영생교 사건이나 온갖 주술행위의 난무함을 두고 국민건강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에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시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감옥에 가는 것 이상으로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문학치료 같은 대체의학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만성적 사회 불통합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그에 반해 문학과 같은 고상한 예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병리현상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병원의 현실 또한 이런 대체의학을 시급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할 환자의 수가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사가 일일이 환자의 심리적인 문제까지 다룰 수 없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예방과 (부분적) 진단, 회복과 (부분적) 치료에 문학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언어로 말하자면 win-win 전략이 될 수 있다. 문학적 관점에서 문학치료는 대체의학일 뿐 아니라 대체문학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정신과학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 학생들이 취업을 할 수도 없고 대학의 자리는 한계가 있다. 이들에게 치료적 영역을 제공하는 것은 정신과학이 원래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재삼 확인케 해준다. 하지만 이런 정신과학(문학, 철학, 역사학 등)이 원래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수문제이다. 아무리 문학으로 인간의 정신적 삶에 도움을 줌으로써 의미를 찾는다 해도 측정할 수 없는 이 분야에 어떤 보상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 현대사회는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어떤 철학자가 상담해준 사람의 의료수가를 지불해달라는 요구를 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데 대한 보수를 개인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제도에 요구한 것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런 데 대한 아무런 회답이 없지만 ― 이 문제는 물리적이고 인과론적인, 증거 중심의 사회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 그것을 위한 전 단계로 문학치료 또한 제도에 포함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독일 같은 경우도 예술치료가 전쟁 후에 시작되어 70년대가 되어서야 의료 수가를 받는 제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의사의 통제 하에 의료수가가 지불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제도적 장치가 없으므로 의사의 통제 하에 상담수가가 지불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경우 의료수가가 너무 적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소를 열어서 더 많은 수가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독일에서는 예술(심리)치료사가 직접 개업을 할 수 있고, 또한 그에 대한 제도적 검증장치 또한 만만치 않다. 독일의 의료수가는 10여년 전에 이미 시간 당 70-100마르크(당시 (한화 4만원-6만원)정도였고 지금은 거의 60-100유로(한화 8만원-13만원) 정도 된다. 뿐만 아니라 치료사나 의사의 진단서가 있을 경우 의료보험에서 70%까지는 지불되고, 장애인이나 다른 복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100% 의료보험에서 지불된다. 그 이외에 진단서가 없어도 부모가 아동을 치료받게 하고자 하는 경우는 본인이 전적으로 부담해서 치료를 받는데 그것은 성인도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서구사회에서는 문학과 심리, 예술과 치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치료사/의사의 문학에 대한 전문지식 또한 문학 전공자를 능가하며, 병원에서 실제로 환자가 독서를 풍부하게 할 수 있으며, 문학부의 교수 또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같은 것을 복수전공 내지는 통합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학제간으로 얼마든지 응용될 수 있는 좋은 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선 검증할 수 있는 배경, 특히 문학이든 의학이든 학제간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이며 그에 대한 임상보고는 거의 선진국의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학 연구도 이 점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문학의 기능에 대해 겨우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든가 아니면 문학사만 연구해왔지 독서의 심리라든가 인간이 표현하면서 실제로 어떤 인격을 완성해 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치료가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기 십상이고, 그런 점에서 의사협회에서는 이 분야에 대체의학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바램은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의료진과의 공동연구 아래, 그리고 그들의 보호와 검증 아래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하나의 대체의학으로서 일상적 삶에서 문학을 하나의 예방과 치료수단으로 생활화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적극적인 문학치료의 관점에서는 국가고시 같은 통로가 주어져 국가법으로 규정하는 문학치료사가 탄생되어 자율적으로 의료수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술에 배부를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경북대학교에서는 2004년도부터 대학원 학과간 협동과정(의과대학 정신과교실+문학부+심리상담학부)으로 문학치료학과가 개설된다. 문학영역과 의학영역, 그리고 심리·상담 영역의 교수진들이 연합하여 학과를 개설하는 만큼 좋은 결실을 맺도록 의료계의 도움과 충고, 논의가 진정으로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