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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철수는 철수다


노경실 . <미운 돌멩이> 중에서


1. 김철수
"아니, 아니, 이게 뭐야?" 찬찬히 시험지를 보던 어머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끝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대답도 안 했습니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월말고사 때문에 나처럼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역시 한 달에 한 번씩 초상을 치릅니다. 초상이 무어냐고요? '저는 시험을 못 본 죄인이니 죽여주십시오. 아니, 야단 맞는 순간이나마 잠시 죽은 듯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고 그 무서운 순간을 버티는 걸 '초상 치른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시험지를 받고 집에 돌아갈 때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 우린 성적 때문에 자살하진 말자. 우린 악착같이 살아서 성적이 성공 순위가 아니요, 행복 순이 아니란 걸 보여줘야 한단 말이야." "헤헤……. 그 대신 야단 맞는 순간만큼은 죽었다 생각하고 지내자, 이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히 죽는 게 아니라 순간 순간 죽는 거네, 헤헤." 아이들은 시험과 성적에 대해서라면 아주 도를 깨달은 시험 도사들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겁 많은 도사들입니다. 나 역시 겁 많은 도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살은 무서워서 못 하고, 공부 못하는 주제에 부모님에게 대들 수는 없고, 그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삼십육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갖은 소리로 야단을 치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해도, 고개 푹 숙이고 얌전히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있으면 곧 조용해지거든요.


"아니, 엄마가 말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이게 도대체 시험지냐? 아니면 빨간 소나기가 내린 거냐?" 시험지 문제의 번호에 동그라미 대신 틀렸다는 빨간 줄이 더 많이 그어진 것을 어머니는 늘 '빨간 소나기'라고 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학교는 내가 다니고, 시험을 못 봐서 속상하고 창피한 사람은 나인데, 왜 어머니가 저렇게 화를 내고 흥분을 할까요? 부모, 자식 사이라서 어머니도 나만큼 속상해서일까요? "도대체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한 달에 얼만 줄 알기나 해?" 어머니는 시험 성적이 나쁠 땐 늘 돈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가 하도 그래서 나도 대강 따져 본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 학원비, 수학·영어 학원비, 그 밖에 학용품 값, 월부로 산 위인전, 과학 전집, 교육 보험, 장학 적금……. 이런 계산을 하다 보면 솔직히 말해, 어머니가 아무리 야단을 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딴 식으로 공부하려면 아예 그만둬! 차라리 공장에 가서 기술이나 배워. 너 하나 공부 안 시키면 우리도 60평짜리 아파트로 금방 갈 수 있어!" 끝내 어머니는 공장 이야기와 60평짜리 아파트 꿈을 펼칩니다.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요? 언젠가 친구 집에서 농촌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을 봤습니다. 그 가운데 3학년 아이의 글이 나와 비슷한 처지라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공장과 아파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아이의 글을 떠올리곤 합니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강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공부 못 하면 너도 농사나 지어야 한다. 중학교도 안 보낼 거다. 그러니까 공부 잘 해서 너도 잘 되고, 부모도 호강시켜라." 그 아이의 부모님은 늘 이런 협박 아닌 협박을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골 아이들은 공부 못 하면 농사나 지어라 하고, 서울 아이들은 공부 못 하면 공장에나 가라 합니다. 시골 아이나, 서울 아이나 공부 못 하는 아이는 불쌍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동화책에선 서울 쥐보다 시골 쥐가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산다고 나와 있는데 어떻게 사람은, 아니 아이들은 시골 아이라도 편하게 살지 못할까요? 사람이 쥐만도 못하게 산다면 말이 됩니까? 더구나 난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이라 공장에 갈 수도 없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미술인데 말입니다.


"아니, 또 입 다물고 있는 거야? 그러고 있으면 다 용서받는 줄 알아? 이 시험지가 100점짜리로 변하느냔 말이야! 1208호 준태를 본받아라, 본받아, 응? 준태는 분명 또 '올백' 받았을 거다. 왜 넌 공부를 못 하니? 같은 밥 먹고, 같은 학교 다니고, 같은 아파트 사는데 넌 왜 밤낮 이 모양이야! 더구나 엄마는 준태 엄마보다 더 좋은 대학을 나왔단 말이야!" 드디어, 드디어 어머니가 1208호 준태 이름을 꺼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화가 가장 꼭대기까지 났을 때 준태 이야기를 합니다. 바퀴벌레라는 말보다 더 징그럽고, 마귀라는 이름보다 더 끔찍한 이름, 박준태.


2. 박준태
내가 준태를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입니다. 준태를 알기까지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나. 우리 세 식구가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나는 별로 꾸중을 듣지 않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얼굴을 별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다니던 어머니가 갑자기 이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휴, 이젠 우리도 강남 사람이 됐어요." 어머니의 이 한 마디 말 뒤, 나는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강남구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이 되었고, 시영 아파트랑 비교도 안될 만큼 넓고 깨끗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강남으로 이사한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나도 이젠 체면 좀 살릴 수 있게 됐군. 뭐? 자가용도 신청했다고? 어이구, 틈틈이 배워 둔 실력을 이제 써먹게 됐군. 역시, 당신이 최고야. 내가 당신 덕분에 체면 세우고 산단 말이야. 난 집안에서 살림만 하고 멍청히 사는 여자들을 보면 한심하단 말이야. 철수야, 넌 그저 엄마 머리만 닮아라. 역시 엄마는 똑똑한 사람이야. 너도 나중에 엄마처럼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허허허……." 아버지에겐 강남으로 이사한 것이 행운이요, 체면 살리는 일이 되었지만, 난 정반대였습니다.


우리는 108동 1205호, 준태는 1208호. 처음엔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진 않았습니다. 한 반도 아니었거든요. 순전히 어머니들 때문에 가깝게 된 겁니다. 준태 어머니는 아파트 부녀회장이고, 우리 어머니는 이사하자마자 부녀회의 일을 열심히 해서, 두 사람이 가깝게 되는 바람에 우리도 형제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둘은 모두 외아들이거든요. 그런데 올해, 그러니까 준태와 내가 5학년이 되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달라져 갔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철수야. 너도 내일부터 학교 앞에 있는 신나라 컴퓨터 학원에 다녀라. 엄마가 오늘 접수시켰으니까 내일 가면 컴퓨터 책도 줄 거야. 하루도 빠지면 안 돼!" "엄마, 난 미술을 배우고 싶어요. 컴퓨터는 싫어요." "뭐라고? 1208호 준태는 컴퓨터 학원에 다닌 지 벌써 1년 2개월째래. 그래서 올 겨울엔 전국 컴퓨터 대회에도 나간다고 하더라. 남자가 컴퓨터 정도는 배워야지. 뭐? 미술을 배워? 미술 해서 돈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겨우 한 두 사람 정도야." "난 돈 벌려고 미술을 하려는 게 아닌데……." "시끄러워! 비싼 돈 들여서 접수시켜 놓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내가 컴퓨터 배우려고 그러니? 다, 너 잘 되고, 너 성공하고, 남들한테 뒤지지 말라고 돈 쓰는 거야. 알았어?" 이것이 바로 어머니가 나와 준태를 직접 대 놓고 비교한 첫 사건입니다.


그 다음부터 어머니는 나와 준태를 사사건건 비교하며 야단칩니다. "운동 좀 해라. 날마다 앉아서 동화책만 읽으면 샌님 모양 점잖기만 하지, 체력이 떨어져. 박준태 좀 봐라. 그 앤 아파트 어린이 야구회 선수야, 선수." "철수야, 너 오늘부터 이 책을 읽어라. 이게 얼마짜리 책인 줄 아니? 월부로 샀어. 과학 전집인데 준태는 벌써 이 책을 두 번째 읽고 있는 중이래. 하여간 준태는 보통 애가 아니야. 벌써 노는 게 다른 애들이랑 틀려." "철수야, 공부 좀 해라. 준태는 이번 수학 경시 대회에서 일등했다며?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니? 창피해서? 그럼 너도 일등 좀 해, 일등! 어휴……. 준태 엄마는 얼마나 좋을까. 보는 사람마다 일등 엄마라고 하니. 나는 언제 일등 엄마가 돼 보냐? 네가 일등을 해야지 나도 일등 엄마 소리를 듣고 살잖아!" 어머니의 이런 꾸중과 잔소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철수야, 이게 학원 수강증이다. 내일부터 당장 다녀. 수학이랑 영어야. 네가 준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 과외를 시키고 싶지만 그건 너무 비싸서 학원에 보내는 거야. 배워서 남 주니? 너도 공부해. 악착같이 해서 보란 듯이 일등 하는 거야, 알았지?" 이제껏 묵묵히 어머니의 말을 따랐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사정사정 했습니다. "아버지, 전 컴퓨터도, 수학·영어 학원도 다 싫어요. 저는 집에서 공부하고, 동화책 읽고, 그림 그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엄마에게 잘 얘기해 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웃었습니다. "허허허……. 철수야, 그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언제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냐? 그리고 엄마 말 잘 듣는 게 효도야. 그래야 집안이 조용해지잖아."


이뿐인 줄 압니까? "아버지, 엄마는 날마다 나랑 준태랑 비교만 해요. 난 김철수지 박준태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니까, "허허……. 준태가 공부를 잘 하니까 샘이 나서 그런 거야. 너도 준태 처럼 공부 잘 하면 누가 널보고 뭐라고 그러겠냐?" 하는 게 아닙니까? 이 일이 있은 뒤로 나는 아버지와는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강아지처럼 따라 했습니다.


3. 김철수는 김철수다.
그러다 수학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영어나 컴퓨터는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받아 온 시험지도 모두 60점 대입니다. 어머니가 펄펄 뛰며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준태랑 또 비교를 당한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입니다. "다음 시험 또 못 보기만 해 봐라. 그 땐 준태가 네 형이고, 넌 준태 동생인 줄 알아! 내가 준태한테 널 동생으로 생각하라고 할거야!"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시험 성적이 나쁘다고 나랑 동갑내기인, 게다가 나보다 생일이 석 달이나 뒤인 준태가 내 형이 된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성적으로 형, 아우를 따진단 말입니까? 혹시 우리 어머니가 진짜 준태 어머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겠죠.


어쨌든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슬퍼서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쯧쯧, 이젠 울기까지 해! 네가 사내 녀석이냐? 준태 좀 봐라. 얼마나 남자답고 당차냐!" "그만 해요! 난 준태가 아니에요. 난 김철수란 말이에요." "아니, 이젠 반항까지 해? 엄마가 너 하나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알아주기는커녕 이젠 대들기까지 해? 준태 좀 봐, 생전 부모에게 말대꾸를 하는가!" "그만해요! 나 죽을래요! 죽어서 박준태랑 똑같이 돼서 태어날게요. 내가 죽으면 엄마는 힘들지도 않고 좋잖아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죽을 테니까 준태를 엄마 아들로 삼아요, 그러면 되죠?" 나는 엉엉 울면서 베란다로 뛰어갔습니다. "얘, 철수야, 철수야! 무슨 짓 하려고 그래? 이 엄마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어머니가 급히 뛰어와 날 잡았습니다. 12층에서 내려다본 땅바닥은 아찔할 만큼 무서웠습니다. 날마다 보아왔지만, 죽겠다는 마음을 먹고 보니 갑자기 무서움을 느낀 겁니다. 그러나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철수예요. 나는 준태가 아니란 말이에요. 날 생긴 그래도 놔 둬요. 철수는 철수란 말이에요. 엉엉……."